A4 반도 되지 않은 크기에 125쪽. 근래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작고 얇은 책이다. 근데 이 책에 또 하나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근래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나를 불편하게 만든 책이다. 분량이 얼마 되지 않고 어렵지 않아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하고, 읽고 나서도 그 불편함이 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할 일을 제치고 그 불편함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이게 만드는 책.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느린 걸음>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불편함의 근원은 그녀가 실제로 대학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이다. 책 두번째 장 '나의 적들의 이야기' 네번째 소제목은 '배움을 독점한 국가'다.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채, 하지만 핵심은 대충 이해했다고 자위하면서 꾸역꾸역 읽었던 책,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 책이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이 이렇게 불편할 수도 있구나'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책이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조금 사그라질 수 있었던 것은 박홍규 교수의 역자 후기를 읽고 나서였다. 이반 일리히가 <학교없는 사회>에 대해 역설하면서도 본인 스스로 대학 교수의 지위를 버리지 못해서 비판 받았다는 것, 역자 자신 또한 그것까지 버릴 용기가 차마 없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불편함이 조금이나마 가셨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실제로 대학을 그만두었다. 말로만 '배움을 독점한 국가'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가 독점한 배움'을 거부한 것이다.
그녀와 비슷하게 소위 지방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일류대학을 졸업한 나는 대학을 다닐때, 아니 졸업을 하고나서도 한참 후에까지도 나의 지방 명문고와 일류대학 학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미 가진자는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 자신이 가진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자, 학벌사회에서 학벌을 가진자,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난자가 그렇다. 또한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지금처럼 교육 혹은 학벌의 문제가 사회의 핵심 이슈 중 하나로 등장하기 전이기도 했고, 내가 학벌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당시 나의 주/객관적인 상황은 그녀와 같은 고민과 실천을 할 정도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뭐 때문에 이렇게 불편해 하는걸까?
여기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문제/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오히려, '지방 명문고를 나오고 일류대학을 다니면서 사회문제/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다. 주변에서도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고, 나 또한 그런 시선을 즐겼다. 사회문제/노동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 명문고와 일류대학 학벌 그리고 의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수준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였다. 나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상태와의 불일치. 이게 바로 불편함의 첫번째 근원이 아닐까 싶다. 그녀 역시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상황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과감하게 머리에 맞춰 몸을 바꾸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 첫번째 시도가 대학을 그만두는 것이었을 테고. 나는 여전히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어서 불편한게 아닐까?
(이 얘기는 최근 조국 교수의 부상을 계기로 재점화된 '강남좌파' 논란과 맥이 닿아 있다. 지금 강준만 교수의 <강남좌파>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 근원은 실제 내 주위에 그녀처럼 머리에 맞춰 몸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보다 10여년 먼저 대학생활을 경험했다. 길지 않아보이지만 그 사이에 IMF시대가 있었고, 그걸 전후로 우리 사회는 무척 많이 달라졌다. 그녀의 고민과 결정을 십분 이해하고 인정하지만 나와는 다른 상황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얘기할 수 없는 건 앞서 얘기한 바로 내 주변에서 그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나와 같은 시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나와 같은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이미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 후배들... 우리 연구소의 콩, 인권운동사랑방의 미류, 사회진보연대의 윤정, 동근, 태훈 등... 존경스러운 그들의 존재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기억이 또한 나를 불편하게 한다.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나에게도 역시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매번 몸을 바꾸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물론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머리와 몸은 그녀 혹은 나의 존경스러운 친구들, 후배들과 다르고 나의 결정이 그들의 결정과 같을 수는 없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혹시 나의 머리를 몸에 맞추어 가는 과정은 아니었던가? 시간이 흐르면서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굳어갈텐데,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나의 머리에 맞춰 몸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불편함도 있다.
책 세번째 장 '거짓 희망에 맞서다' 첫번째 소제목은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그녀의 자신의 대답은 No!다. 스스로 진보라고 규정짓고 역할을 자임해왔던 주체 중 하나로서, 그리고 진보의 선배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radical하다는 것은 근원적이라는 것이다. 근원적이라 함은 사태를 전체적으로 보고, 문제의 원인을 바탕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 그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려는 태도이다. (중략) 무엇보다 사람이, 진보적 자기신념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 자체가 먼저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진보는 이러한 근원적인 가치투쟁에서 매일 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 (중략) 그것은 실상 물질적이고 권력정치적이고 비생태적이고 엘리트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삶의 내용물에서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
나라고 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불편하다.
책 세번째 장 '거짓 희망에 맞서다' 네번째 소제목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다'이다. 최근에 불고있는 인문학 붐에 대한 비판이다.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과 '삶'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학'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심리'학'을 전공해서 고통 받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혹시 최근 내가 읽고자 하는 책들에서 나는 진정 '삶'을 구하고자 하는 것인지, 혹 '학'을 구하고자 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보다 10년 늦게 태어났으나, 나보다 훨씬 치열하게 20대의 삶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한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나를 불편하게 해줘서...
사족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세상을 향해 가열찬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그녀가 유일하게 긍정하는 단 한 사람의 시인이 있다. 알고보니 그는 박노해였다. 그리고 그녀는 후기에서 <대학생 나눔문화>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음을 밝히고 있다. 출소를 전후해서 최근까지 박노해의 행보에 대해 비판의 말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런 비판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녀가 글과 행동에서 보여준 진심과 그 비판을 굳이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 꼭 그래야 하는가?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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